2024. 6. 5. 14:16ㆍBook
동양 여성 작가가 쓴 백인 여성 작가의 고군분투기.
2024년 갑진년 새해가 밝았다. 1년에 책 두세 권도 읽지 못했던 지난 7년의 세월을 속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유난히도 힘들었던 지난 5년을 보내고, 풍파가 잠잠해졌던 2년 동안은 마음 편하게 아이를 키우며 프리랜서 일을 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간 줄어든 집중력과 마음의 양식을 채우기 위해 독서를 하기로 했다. 동네 김밥집을 지나치는데, 유리문에 A4용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영어 원서를 읽는 모임 참여자를 모집한다는 안내문이었다. 김, 김밥집에? 원서 읽기 모임 안내문이!?
원서 읽기 모임 회원 모집
010 - xxxx - xxxx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문자를 보냈다. 1주일 뒤에 뵙기로 하고 두근두근 그날을 기다렸다. 나오신 분은 나보다 연상인 고운 단발머리의 여자분. 알고 보니 김밥집 사장님은 영국에서 오래 살다 오신 분인데, 바쁘셔서 요새는 참여를 못하신다고 하셨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참여하신다고. 여하튼, 서로 원서 읽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분이 추천해 주신 책 <<Yellowface>>로 시작하기로 했다. 그분을 통해 리즈 위더스푼이 Reese's Book Club x Hello, Sunshine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성의 내러티브를 들려주는 책을 선정하여 독서를 권장하는 모임이라고 했다. 영화 <금발이 너무해>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리즈 위더스푼은 영화 판권도 왕성하게 사들이는 사업가였다!
리즈 위더스푼의 북클럽 사이트
책 소개
<<Yellowface>>도 여성 작가의 고군분투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리즈 위더스푼의 이목을 끌었을까? 종이책으로 사서 보면 독서에 한계가 많을 것 같아 Amazon에서 전자책으로 보기로 했다. 요새 킨들은 굿리즈(Goodreads.com)와 연동되어 있다. 리뷰를 보고 책을 추천받을 수 있어서 더 편리했다. 봤더니 해당 작품이 2023년 Goodreads Choice Awards에서 독자들의 선택을 받은 소설 1위였다. 더 기대가 되었다.
책에서 주를 이루는 문장은 대부분 현재 시제이다. 과거 시제로 진술되는 것보다는 확실히 느낌이 더 생생하다. 머릿속에서 한국어로 번역하여 읽어보면 살짝 어색하긴 하다. 한국어 번역은 어떻게 되려나. 일단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The night I watch Athena Lui die, we're celebrating her TV deal with Netflix.
그날 밤, 나는 Athena가 죽는 걸 보았다. Athena와 나는 Athena가 넷플릭스와 TV 시리즈 계약을 성사시킨 걸 함께 축하하고 있었다.
얼마나 구미가 당기는 첫 문장인가. 대체 어떤 내용이 이어질지 기대가 되고도 남는 문장이다.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편이며, 중간중간에 과거 이야기가 끼워져 있다. 읽어나가기에 크게 어려운 전개는 아니었지만,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의 시점에서 쓴 글이므로 꽤 어려운 어휘가 종종 등장했다. 사전을 찾아가면서 읽다가, 중간부터는 포기하고 일단 내용을 이해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을 정도. 또 시대적, 문화적인 배경 지식이 꽤 있어야 술술 읽히는 책인 것 같다. 일단 Twitter(지금은 X가 되어 버렸지만. 한국어 번역에서는 제발 트위터라고 지칭해 주길!)를 하는 사람이라면, 주인공을 정말 절절히 이해할 수 있다! R.F. Kuang이 요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점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다. 책을 다 읽고 든 생각은, '작가라는 직업은 정말 피곤한 일이겠다'였다. 주제 선정, 자료 수집, 판권 계약, 홍보, 판매, 작가들 사이의 알력 다툼 등등.. 작가라면 겪어야 하는 온갖 일들이 절절하게 펼쳐진다.
책의 줄거리 (Spolier Alert!)
'나'와 Athena와 예일대를 다니면서 서로 알게 된 사이이다. 학교를 다닐 때는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기반을 두고 지내는 지역 등이 겹쳐 서로 작가로서의 고충을 나누는 그럭저럭 잘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Athena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데뷔 소설부터 거액의 계약을 따낸 잘 나가는 작가(a hotshot writer)이며, 얼굴과 몸매까지 예쁜 셀럽(celebrity)이다. '나'의 이름은 June Hayward로, 평범한 백인 작가이자 학원 강사이다. June은 Athena를 동경하지만 동시에 미치도록 질투하고 증오하며 지낸다. 이 복잡한 심경을 비롯한 이야기는 June의 시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되는데, 속으로 생각하는 내용을 묘사하는 '솔직함'이 압권이다.
Athena는 넷플릭스와 거액의 판권 계약을 맺는다. 신문 기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이해해 주는 사람은 '동료 작가' 밖에 없다. Athena는 June을 찾고, 둘은 밖에서 이미 만취한 상태로 놀다가, Athena의 아파트에 함께 와 구경을 하고 팬케이크를 만들어 먹는다. 그런데, 팬케이크 조각이 Athena의 목에 걸린다. June 은 온갖 그 조각을 빼내려고 온갖 노력을 하지만, 결국 Athena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로 사망. 911을 불렀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Athena가 사망한 뒤였다. 그러나 구조대원들이 도착하기 전, June은 Athena가 막 1차 탈고를 마친 소설 원고를 훔친다..! Athena는 오래된 타자기로 글을 쓰기 때문에, 컴퓨터에 파일을 저장해두지 않고 원고를 그대로 쌓아두었고, 그 덕에 절도가 더 쉬웠다. 훔친 원고의 이곳저곳을 고쳐 쓰고 보강하여 June은 마치 자신의 소설인 것처럼 Juniper Song이라는 필명으로 책을 출간하고, 그 책은 말 그대로 '대박'을 친다. 그 소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로 노역에 동원된 중국인들(중국인 노동부대, Chinese Labor Corp)의 숨겨진 역사에 대한 내용이었다. June의 내면은 그때부터 바닥으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June이 훔친 원고를 출간한 순간부터 독자들은 손에 땀을 쥐게 될 것이다. 언제 사람들이 알게 될지, June은 시시각각 몰려드는 위기를 과연 극복해 낼 것인지. 재미있는 소설이 늘 그렇듯, 이야기는 항상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간다. 어제까지 만인에게 그저 동경의 대상이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bitch가 되고야 마는 그런 결말. 그런데 우리 모두 매일매일 좋은 사람과 bitch의 경계를 오가지 않던가? 완독 한 후 책을 덮으니 (나는 e-book으로 읽어서 물리적으로 책을 덮진 않았지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세상사의 복잡함을 참 재미있게 각색해서 쓴 이야기이구나. 인종차별 이야기, cancel culture (유명인이 과거에 했던 발언 등으로 사회적 논란이 SNS 등에서 거세어지면 그 사람 자체를 보이콧하여 사회적 지위, 직업 등을 잃게 만드는, 일명 '취소시키는' 문화), MZ 세대의 사회적 고민, 사회 계층 구조, 윤리적 딜레마 등등을 버무려서 정말 재미나게 잘 쓴 소설이다. Page-turner 그 자체!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린다.
덧.
한국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그리고 중간에 Kim Jong Un’s girlboss propagandist sister라는 언급도 있...
Underlined sentences
“Just relax, June. You’re going to get some haters.It comes with territory. ..." (걱정 말아요, June.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길 거예요.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일상적인 일이에요.)
Don’t we all want a friend who won’t ever challenge our superiority, because they already know it’s a lost cause? Don’t we all need someone we can treat as a punching bag? (우린 모두 나의 우수함에 감히 덤빌 수도 없는, 자신이 내게 이미 졌다는 걸 아는 친구를 원하지 않는가? 우린 모두 샌드백처럼 다룰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지 않느냔 말이다.)
“It’s a translation, really. And translation across mediums is inherently unfaithful to some extent. Roland Barthes. An act of translation is an act of betrayal.” ("사실 번역의 문제죠. 매체에서 매체로 번역되다보면 원래 어느 정도는 원문에 위배될 수 밖에 없지요. 롤랑 바르트도 그랬잖아요. 번역하는 행위는 배신과 다를 바 없다.")
Isaac Asimov was a serial sexual harasser; so was Harlan Ellison. David Foster Wallace abused, harassed, and stalked Mary Karr. They are still hailed as geniuses. (몰랐던 충격적 fact를 소설에서 알게 되다니이이)
You lose all sense of security, because at every moment—when you’re sleeping, when you’re awake, when you’ve just put your phone down for a few minutes because you’ve hopped in the shower—dozens, maybe hundreds, maybe thousands of strangers are out there, mining your personal information, worming their ways into your life, looking for ways to mock, humiliate, or worse, endanger you.
Writing is the closest thing we have to real magic. Writing is creating something out of nothing, is opening doors to other lands. Writing gives you power to shape your own world when the real one hurts too much.
The netizens who love to argue for the sake of arguing will look for the holes in Candice’s story. The character assassinations will begin. We’ll all get dragged down in the mud, and when the dust clears, all that will remain is the question: What if Juniper Song was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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