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12. 00:37ㆍBook
어슐러 K. 르 귄의 작품을 언젠가는 꼭 몰아서 읽어보고 싶었는데, 몰아서 볼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을 듯하다. 단편 모음집이지만, 단편 하나하나 생각할 거리가 참 많고 이해하는 데도 좀 걸려서, 이 책을 읽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샘레이의 목걸이>, <명인들>, <겨울의 왕>, <땅속의 별들>, <시야>,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혁명 전날>을 인상 깊게 읽었다. 나는 중세 판타지물과 스타트렉 같은 sci-fi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작품들을 더 몰입해서 읽었던 것 같다. 인간과 사고방식, 문화, 언어, 행동 양식이 전혀 다른, 우리와 연관성이 전혀 없는 외계 생물체가 너무나도 당연한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 자체에서 잔잔한 충격을 받고, 내용 전개에서 또 2차적 충격을 받았다.
예전에 수업을 듣다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영문으로 읽은 적이 있다. 이번에 한글로 읽었는데, 모국어로 읽어서 그런지 영어를 잘 못했어서 그런지 ㅋㅋㅋ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앉은자리가 배설물로 가득하고, 옥수숫가루와 기름 반 그릇으로 하루를 연명하며 지하 감옥에 갇혀 지내야 하는 아이가 있어야, 일상을 그럭저럭 행복하게 유지할 수 있는 오멜라스 사람들. 그 사실을 알고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슬프지만 아이를 풀어줄 경우 사라질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어 그저 지내는 사람들.
드라마 <굿 플레이스>를 보면, 악한 일 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도 지옥에 상응하는 Bad Place에 온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도 복잡해서, 남에게 물리적 해를 끼치지 않고 법을 지키며 살았더라도, 한 개인이 하는 행동이 무수히 많은 악을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기를 주로 먹는 착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고기를 만들려면 동물을 키워야 한다. 동물을 키우면서 분뇨 때문에 환경오염이 생기고, 식량 부족 국가에 돌아가야 할 옥수수나 기타 곡물은 동물 사료로 쓰여 그 사람이 먹을 고기를 살찌우는 데 쓰인다. 현대인의 행복은 전 세계 누군가에게 고통을, 혹은 환경에 오염을 가하는 행동들을 기반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나는 오멜라스에 사는 사람이다.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우주선 탑승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말고는 이곳을 떠날 방법이 없다. 그저 내가 사는 곳을 덜 오염시키고자, 내가 여기 살다가 가는 흔적을 없애고자 발버둥 칠 수밖에 없다. 부채의식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무책임한 행복은 오멜라스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응답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The Ones Who Stay and Fight. N. K. 제미신이 쓴 작품이라는데, 이것도 그다음 책을 읽고 나서 읽어보아야겠다.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의 첫 작품으로 수록되었다고 한다.
아래는 뉴욕타임즈 책 소개 칼럼에서 The Ones Who Stay and Fight를 다룬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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